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약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고 문명을 이룩하게 된 건 바로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자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 직접 경험하기보다 사자는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인류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인간과 함께할 생존 수단입니다.
스토리텔링이란?
스토리텔링은 Story + Tell + ing의 합성어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토리(Story)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스토리 :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된 이야기
스토리텔링 : 이야기를 구성해 효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동화들은 대부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주인공이 태어나는 것이고, 모든 이야기의 끝이 주인공이 죽는 것이라면 이야기의 교훈을 전달하는데 비효율적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했던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주인공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죠. 주인공이 어떤 욕망을 가졌는가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입니다. 인류의 관심사가 특정 인물(대부분 영웅)의 일대기에서 개인의 욕망으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입니다. 헐리우드는 바로 이 시학에 나온 주인공의 욕망을 다루는 3장 구조(설정-대립-해결)를 채용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죠.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의 구조를 정리할 때 동양에서는 기승전결(起承轉結) 형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발전합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아리스토 텔레스의 3장 구조의 비율은 (30p:60p:30p) 1:2:1입니다. 이것은 (기)(승전)(결)의 구조와 비슷합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전혀 다른 시간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승전결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이 나타났으며, 어떤 결말이 있었는가라는 구조로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起) _ 무대 설정 및 주인공의 욕망 설정, 발단
- 기(起)에서는 세계관(인물, 사건, 배경)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결핍에 의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이 강렬하게 무엇인가를 원하면서 시작합니다.
승(承) _ 욕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 전개
욕망이 생겼으니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해야겠죠? 여기서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가에 따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선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전(轉) _ 그것이 너무나도 어려움, 위기
그것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위기는 반드시 주인공이 선택한 행동이 불러오는 핵심적인 위기여야 합니다. 즉 인과관계에 따른 '위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과관계를 벗어나면 관객은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결(結) _ 그것을 이루거나, 실패함으로 인해 교훈을 얻음, 결말
결말은 반드시 기(起)에서 설정한 주인공의 '욕망'의 결과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면 그가 선택한 행동이 교훈이 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다가온 위기가 반면교사가 될 것입니다. 만약 결말에서 주인공의 욕망의 결과를 다루지 않는다면 관객은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이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4컷 만화
기승전결이 동양의 스토리텔링 방식이기 때문에 이 방식을 채용한 4컷 만화도 동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래는 기승전결의 형식에 가장 가까운 데츠카 오사무의 4컷 만화 예시입니다.
기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욕망)
승에서는 손주랑 놀기 위해 박수를 치며 뒤로 점프를 하며 갑니다. (행동)
전에서는 그 행동(뒤로 점프)에 의해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위기)
결에서는 그것을 보고 손주가 박수를 치며 좋아합니다. (결말)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손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죠. 그리고 결론에서 손주가 즐거워합니다.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졌고 우리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죠! 스토리텔링은 어쩌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한 예술'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On your mark의 구조 해석
이와 같은 기본 지식을 토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95년작 뮤직 비디오 'On Your Mark'를 분석해보겠습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반복되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전개를 보여줍니다. 어떤 구조로 짠 것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을 기승전결로 짰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상 문법은 3장 구조를 철저하게 따르기 때문에 당연히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3장 구조로 분석을 한다면 이 이야기는 완벽하게 분석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브리의 스토리보드를 보면 대부분 A, B, C, D 파트로 짜는데 아마도 기승전결로 구조를 분리해서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첫 번째 엔딩 (기 - 결)
앞서서 말했듯이 기에서 설정한 주인공의 욕망의 결과가 결에서는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이 이야기의 완전한 구조입니다. 이처럼 승, 전이 빠지면서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뮤직비디오가 끝난다고 해도 우리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습니다. 욕망을 인식했고 결과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났을지언정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되기 힘듭니다.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에 공감하지 못한 체 끝나버렸기 때문이죠.
2. 두번째 엔딩 (기 - 승 - 결)
다시 이야기가 기로 돌아와 이번에는 승으로 연결됩니다. 주인공인 원하는 것이 생겼으니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동한다는 구조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인과관계에 따라 위기를 불러옵니다. 하지만 이때의 위기는 결말과 같습니다. 모두 떨어져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이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첫 번째 엔딩 (기 - 결)과 같이 이야기의 구조는 완성되었지만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된 것이죠.
3. 세번째 엔딩 (기-승-전-결)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완전한 기승전결로써의 이야기를 감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엔딩은 기-결 (1:44 | 바로 날려준다. 하지만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힘듬.)
두 번째 엔딩은 기-승-결 (4:40 | 3명이 함께 죽는다. 현실적인 종말.)
세 번째 엔딩은 기-승-전-결 (6:10 | 완벽한 이야기의 구성이자 이상적 결말.)
미야자키 하야오는 앞의 두 결말을 '이야기가 되지 못하게' 만들어 세 번째 구조로 관객을 밀어붙였던 것입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 자신의 이상적 세계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대단한 연출력이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네요.
이제 기승전결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양의 시작-중간-끝과 동양의 기-승-전-결이 거의 유사한 구조로 발전했다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은 교육도 일정 부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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